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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을 잊을 때, 참사는 찾아온다” 서해훼리호 침몰 32주기

2025.10.17 (11:07)

KBSLIFE <재난안전119> (25.10.10.) [안전토크] 코너에는 KBS 재난방송전문위원인 정창삼 인덕대 교수가 출연해, 32년전 서해훼리호 침몰 참사를 통해 안전 불감증이 초래하는 비극을 생생하게 되짚어봅니다. 정원 초과, 열악한 안전 설비, 미숙한 인력 운용 등 복합적인 요인이 대형 참사를 부른 과정을 분석하며, 재난 예방을 위한 시스템 개선과 지속적인 안전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줍니다. 또한 과거의 아픈 교훈을 통해 우리 사회의 안전 시스템을 점검하고 미래 재난에 대비하는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서해훼리호 침몰 참사 개요 및 초기 상황

 

[초기 인양 시신 수와 실제 사망자 수의 큰 차이]

잠수사들이 배 안을 살펴봤을 때 14구의 시신만 발견되었다는 점이 탑승 인원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초기 추정의 근거였다.  그러나, 이후 인양 과정에서 30~50구 미만의 시신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과는 달리 150여 구의 시신이 발견되어 큰 충격을 주었다. 

 

[재난 발생의 경각심 강조]

안전에 대한 무시나 등한시가 누적될 때 언젠가 큰 재난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주기 위해 과거 재난의 주기적 발생이 언급되었다. 

 

 

2. 서해훼리호 침몰 참사 당시 상황 (1993년 10월 10일)

 

1993년 10월 10일 오전 9시 5분, 200여 명의 승객을 태운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다소 좋지 않은 기상 조건에서 위도 파장금을 출발했다. 목적지는 전북 부안군 격포항이었으며, 승객 대부분은 주말 동안 위도로 들어갔던 낚시꾼과 섬 주민들이었다. 중간 기착지 식도를 거쳐 항해를 계속했다. 

목적지를 4.6km 남겨둔 지점에서 바람이 강하고 파도도 높아져 항해가 위험하다고 판단, 출발지 위도로 배를 돌리려 했다. 이는 바람이 강하게 불고 파도가 높아져 더 이상의 항해가 위험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높은 파도와 돌풍이 덮쳤고, 110톤급 훼리호는 순식간에 침몰했다. 이 참사는 서해훼리호가 식도항을 출발한 지 불과 40분 만에 발생했다. 

당시 배에는 200여 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선권을 끊어주었던 승무원이 숨져 정확한 인원은 파악되지 않았다. 초기엔 사망자가 42명으로 밝혀졌고, 구조되지 않은 70여 명이 실종되어 대부분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식도항에서 승객을 더 태우고 격포항으로 향하던 서해훼리호의 승객들은 선실에서 잡담을 하거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시 바람이 심하게 불고 파도는 2~3m 높이로 일고 있었다.  격포항으로 가기 위해 배를 돌리고 약 40분 항해하던 오전 10시 5분경, 임수도 앞바다에서 갑자기 큰 파도가 훼리호를 덮쳤다. 한 선원이 배가 오른쪽으로 기울고 있으니 갑판 승객은 선실로 들어가라는 안내 방송을 한 직후, 배가 순식간에 90도로 기울며 침몰했다는 승객들의 증언이 있었다. 

갑판 위 승객들은 파도에 휩쓸리고 선실 승객들은 쓰러지는 등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생존을 위해 출구를 찾고, 구명조끼를 찾고, 유리창을 깨는 필사적인 순간이 이어졌다. 아비규환 속에서 문이 열린 선실 내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왔고, 1, 2등실 승객의 목까지 물이 차는 데 걸린 시간은 2분 정도에 불과했다는 생존자들의 증언이 있었다. 

 

 

3. 서해훼리호 참사의 복합적 원인

 

3.1. 당시 시대적 배경 및 환경 요인

 

1980~90년대 연안 터미널 시설은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다. 사고가 발생했던 10월은 위도의 관광 성수기였으며, 평소 주민들만 이용하던 노선에 낚시객들이 대거 몰렸다. 사고 당일 아침 풍랑주의보가 발령되어 작은 배들이 운항할 수 없게 되자,  낚시 선주들이 육지로 돌아가야 하는 낚시객들에게 "페리를 타지 않으면 오늘 못 나간다"고 하여 많은 사람이 일시에 몰렸다. 게다가 10월은 계절이 바뀌는 시기로, 풍랑이 매우 높고 바닷물 온도가 낮아 해상 사고에 매우 위험한 시기였다. 

 

3.2. 정원 초과 및 승선 인원 미파악 문제

 

첫 뉴스에서 사망자 추정 인원이 110명 정도로 추정되었으나, 이는 평소 배에 통상적으로 타는 인원 개념에서 추정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풍랑주의보와 낚시객들의 이동으로 인해 갑자기 많은 인원이 몰렸다. 당시에는 티켓을 배 안에서 팔았기 때문에, 선사 입장에서는 적자를 메우기 위해 무조건 승객을 태웠다. 이로 인해 매표소가 없어 몇 명이 탔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3.3. 악천후와 선박의 복원력 상실

 

사고 당일 초속 11m/s의 바람(시속 약 40km)이 불었는데, 이는 태풍 기준(초속 33m/s)의 약 1/3 수준이었다. 풍랑주의보가 발령되어 평소 2~3m의 풍랑이 일었으나, 갑자기 4~5m의 큰 파도가 덮쳤다. 풍속으로 인해 스크루가 어선 그물에 얽혀 동력을 잃은 상태에서 큰 파도를 맞게 되었다. 처음에는 뒤에서 큰 파도가 배를 때려 흔들렸고, 결정적으로 좌측에서 4m 이상의 풍랑이 오면서 배가 뒤집히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선박 복원력 상실 원인]

모든 배는 파도가 쳐도 어느 정도 복원력을 가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선박의 무게 중심(부심)이 아래쪽에 있으면 흔들리더라도 복원이 가능하지만, 서해훼리호는 여러 악조건으로 인해 무게 중심이 위쪽에 있었다. 악조건으로는 적재 인원 초과, 화물을 배 갑판에 올려놓은 점 등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좌측에서 파도가 때리자 배가 복원되지 못하고 한 번에 침몰했다. 

 

3.4. 침몰 속도 및 선박 규모

 

배가 침몰하더라도 물이 천천히 차오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바닷물이 굉장히 빨리 차올랐다. 페리라고 하면 큰 배로 생각하기 쉽지만, 서해훼리호의 규모는 110톤 정도에 불과했다. 4~5m의 풍랑이 이는 바다 속에서는 110톤 규모의 배도 낚싯배처럼 굉장히 작은 배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3.5. 미흡한 비상 연락 및 통신 체계

 

사고 당시에는 스마트폰이 없었으며, 핸드폰을 가진 사람도 드물었다. 현재의 AIS(자동 선박 식별 장치)와 같은 GPS 기반 시스템은 의무화되지 않았다. 그나마 단거리 주파 무전기만 작동하여 선장이 침몰 당시 주변에 침몰 소식을 알렸다. 

이 무전 전파는 인근 어선들에게는 전달될 수 있었지만, 해양 경비대에는 몇십 km 반경의 정보만 들렸던 것으로 파악된다. 

 

3.6. 부족한 안전 장비 및 미작동 구명정

 

1980~90년대 한국의 안전 의식은 매우 열악하여, 구명조끼는 형식적으로 몇 개만 비치된 수준이었다. 당시에는 "배는 가라앉지 않는다"는 안전 불감증이 선주와 승객들 모두에게 만연해 있었다. 또한 배에는 원래 3개의 구명정이 있었으나, 사고 당시 작동한 것은 1개뿐이었다. 이 1개의 구명정조차 침몰하면서 배에서 떨어져 나간 것으로 추정되며, 침몰하는 배에서 구명정을 내리고 탑승한 것이 아니었다. 배에서 떨어진 사람들이 이 구명정으로 헤엄쳐 가 몇몇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4. 한국 해상 대형 참사의 20년 주기설과 법/제도 개선 과정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대형 해상 참사]

1953년 창경호 침몰: 330명 사망. 

약 17년 후 남영호 침몰(1970년): 326명 사망. 

약 23년 후 서해훼리호 침몰 (1993년): 292명 사망. 

약 20년 후 세월호 침몰 (2014년): 온 국민이 기억하는 대형 참사. 

 

[대형 참사 이후의 법/제도 개선 노력]

과거 대형 참사가 발생하면 법과 제도를 개선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우리나라 재난 관리 기본 모법인 '재난 및 안전 관리 기본법'은 2002년 태풍 루사 및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등 국가적 대형 참사 이후에 제정되었다. 

창경호, 남영호 침몰 당시에는 해양 어선법이나 해양 운수업 관련 법이 강력하게 개정되지 않았다. 서해훼리호 사건 이후에도 개선 노력이 있었으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많은 부분이 달라졌으나, 작은 어선 사고는 계속 빈발했다. 이에 2025년에는 2인 이상 탑승하는 배에 구명조끼 의무화를 포함한 법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법과 제도 개선에도 불구하고 안전 의식과 현 상황이 잘 맞닿지 않아 20년마다 안타까운 사고가 반복되었다. 

 

 

5. 서해훼리호 침몰 참사 당시 구조 활동

 

배가 침몰한다는 무전을 듣고 사고 발생 20분 만에 위도 주민들이 목숨을 건 구조 활동을 시작했다. 

위도 주민들은 사고 즉시 현장에 달려가 많은 인명을 구해내며 용기와 희생정신을 보여주었다. 

 

[종국호 선장님의 구조 사례]

종국호 선장은 무전을 받은 순간, 평소 배가 지나가야 할 시간에 보이지 않자 침몰을 직감했다. 함께 있던 낚시객들이 위험하다며 내려주고 가라고 했지만, 선장님은 시간이 늦을 것이라며 설득했고, 승객들도 동의하여 함께 구조하러 갔다. 

11명이 승선 가능한 작은 배였지만, 현장에 도착했을 때 배는 보이지 않고 스티로폼만 떠다니는 상황에서 "살려주세요"라는 소리를 듣고 구조를 시작했다. 이 작은 배로 성인 44명을 구조했다. 성인(약 60kg)이 옷을 입고 물에 빠져 있으면 무게가 110kg 정도로 느껴져 사람의 힘으로 올리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배가 흔들리는 악조건 속에서도 구조를 해낸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대규모 구조 참여 및 생존자 수]

더 이상 구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주변 배 46척이 순식간에 도착하여 26명 정도를 추가로 구조했다. 총 70여 명이 구조되어 목숨을 건졌다. 

 

 

6. 서해훼리호 인양 및 추가 사고 원인 규명

 

[인양 작업 시작 및 어려움]

사고 발생 사흘째 서해훼리호 인양 작업이 시작되었다. 2,000톤의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는 만톤급 기준선 '설악호'가 포항에서 대불단지로 향하다 사고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왔다. 설악호는 자체 동력이 없어 2대의 예인선에 끌려 움직였으며, 100m 가까운 긴 붐 아래 87m 대형 크레인이 설치되어 있었다. 침몰된 서해훼리호를 철제 로프로 완전히 감싸 크레인으로 끌어올릴 계획이었으나, 선체가 뻘에 박혀 있어 로프를 묶는 해양 구조대의 작업에 어려움이 있었다. 4cm 굵기의 철제 로프가 선체를 들어 올리는 순간 끊어지거나 선체 철판을 잘라버릴 위험이 있었고, 110톤 선체 내에 가득 찬 뻘의 무게와 수압으로 인한 견인 순간의 위험 부담도 높았다. 기준선은 일단 사체 인양 작업이 끝난 뒤 선체를 끌어올리기로 해군 측과 협의하여 완전한 선체 인양은 더 지연될 것으로 보였다. 

 

[선체 인양 및 추가 사고 원인 발견 ]

서해훼리호는 사고 발생 18일 만에 물 밖으로 인양되어 군산항으로 옮겨졌다. 인양 후 사고 원인과 관련하여 구조적, 인적 문제 등 많은 사실이 추가로 드러났다. 

 

[구조적인 문제]

배수구 크기 미달: 쇠로 만든 배들의 배수구 기준은 110톤 규모의 서해훼리호의 경우 1.6㎡ 정도여야 했으나, 실제로는 0.26㎡ 정도(40~50cm)의 작은 구멍만 있었다. 

 

만재 흘수선 부적절 설정: 만재 흘수선이 원래 1.92m 정도로 아래쪽에 위치해야 했으나, 해운항만에서 2.3m 정도로 높게 지정해 주어 화물을 더 적재할 수 있도록 변칙적인 조치가 있었다. 

 

화물 적재 방식 문제: 섬의 젓갈 등 화물들은 배의 안정성을 위해 무게 중심을 낮추는 밑바닥 화물칸에 실어야 했으나, 사고 당일에는 풍랑과 작업 편의를 위해 갑판에 모두 올려놓았다. 

 

인적 문제:  사고 당일 항해사가 휴가를 갔고, 갑판장이 항해사 업무를 대신하여 항해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러한 자연적, 인적, 구조적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결합하여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7. 사고 수습 과정에서의 문제점 및 개선 사항

 

[서해 바다에 대한 이해도 부족]  

세월호 사고 당시에는 언론 보도로 서해 바다 상황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으나, 서해훼리호 사고 당시에는 서해 바다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다. 서해 바다는 수심이 얕더라도 뻘과 흙탕물 때문에 시야가 거의 확보되지 않아 잠수 시 10~20cm 앞도 보이지 않는 특징이 있다. 

 

[시야 확보의 어려움으로 인한 초기 인양 지연 및 오판]

잠수사들이 투입되었으나 시야 확보가 되지 않아 손으로 더듬어 시체를 인양하는 극한 작업이었다. 초기에는 14구의 시신만 인양되어 탑승 인원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오판의 근거가 되었다. 

 

[인양 작업의 난이도와 추가 어려움]

인양을 위해 선체에 와이어를 감는 작업은 뻘에 배가 1/3 정도 박혀있는 상황이라 매우 어려웠다. 세월호 인양 때도 UDT 대원이 순직할 만큼 극한 작업이며, 당시에는 잠수부 장비도 열악했다. 인양 과정에서 와이어 장착 문제로 한 번 끊어진 적도 있어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최종 인양 결과의 충격]

사고 발생 23일 만에 인양된 후, 초기 추정(30~50구 미만)과는 달리 150대구의 시신이 발견되어 큰 충격을 주었다. 

해난 사고 사상 유례없이 단 한 구의 시신 유실 없이 인양이 모두 완료되었다. 

 

[사고 이후 달라진 점 및 개선 사항]

관광 시즌에 많은 인원이 몰리는 상황을 대비하여 정부에서 여객선 운항 횟수를 유연하게 가져가기 시작했다. 현재는 배 탑승 전 신원 확인(주민등록증 등) 과정이 필수적이다. 또, 배 안에서 승선권을 판매하는 행위는 금지되었다.  AIS(자동 선박 식별 장치)도 의무화되어 통신 및 사고 현장 도착 시간이 빨라졌다. 이밖에 서해훼리호 사고 사망자 상당수가 구명조끼를 착용했음에도 낮은 수온 때문에 사망한 경우가 많아, 골든 타임 확보 능력이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8. 재난 예방을 위한 교훈 및 미래 대비

 

8.1. 안전과 경제성의 관계 및 연안 여객선의 취약성

 

안전과 경제성은 절대 비례하지 않으며,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된다. 

서해훼리호와 같은 연안 여객선 노선은 대부분 경제성이 나오지 않는 적자 노선이다. 

정부 지원 없이는 운영이 어렵기 때문에, 배를 업그레이드하거나 안전 장치를 추가하기 어려운 열악한 상황이다. 

적자 노선일수록 숙련된 인력을 구하기 어렵고, 안전 요원이나 능숙한 선원도 부족하여 더 위험한 상황이 조성된다. 

여기에 대부분의 연안 여객선 승객들은 바다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제적, 인적 취약성과 승객 특성이 결합되어 위험 요소들이 가중될 때, 풍랑과 같은 자연재해가 더해지면서 대형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20년 주기설이 언급되는 이유이며, 평상시에는 괜찮지만 안전에 대한 무시나 등한시가 가중될 때 큰 재난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8.2. 안전 장비 규정 및 관리의 중요성

 

어선마다 구명조끼가 승선 인원에 맞게 비치되어야 하는 법적 기준이 강화되었다. 2025년 10월 19일부터는 2인 이상의 배에 대한 구명조끼 의무화 법이 제정되어 시행될 예정이다. 여객선에 대해서는 이미 법규가 정해져 있었으나, 어선은 미비한 점이 있었다. 

또, 여객 선사나 낚싯배들은 경영난으로 인해 해양수산부 점검 시 다른 배에서 구명조끼를 빌려와 수량을 채워놓는 편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는 경영 여건이 안 좋아지면서 안전을 등한시하는 행태가 불가피하다는 논리로 이어졌으나, 정부 재정 지원 등을 통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부분이다. 

최근 3~4년간 대형 여객선 사고는 없었지만, 10인 미만 낚싯배에서는 1년에 두세 번씩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들은 구명조끼 미비, 저체온증 등이 원인인 경우가 많아 안전 조치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8.3. 열악한 연안 환경과 위험 시기

 

우리나라는 3,390개의 섬 중 480곳이 유인도이며, 이들 대부분의 정기선 노선은 적자 노선이다. 고령화와 주민 감소로 인해 적자 노선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수기(낚시객, 관광객)가 되면 갑자기 인원이 몰려 위험 요소가 가중될 수 있다. 가장 위험한 시기는 계절이 바뀌는 봄철과 가을철이다. 이 시기에는 기압골 변화로 풍랑이 예상보다 훨씬 크게 발생한다. 실제로 세월호와 서해훼리호 사고 모두 봄이나 가을에 발생했으며, 행락객과 낚시객이 몰리는 시기와도 일치한다. 겨울이나 여름은 낚시 등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간절기에 더욱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9. 30초 안전챌린지: 여객선 사고 발생 시 승객 행동 요령 및 관계 기관의 역할

 

[사고 시 승객에게 필요한 확신]

정창삼 교수는 과거 일본 후쿠오카에서 대마도를 오가던 중 배가 표류하여 절망감을 느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승객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조받을 수 있다는 확신', '안전 장비가 있다는 확신', '누군가 빨리 도와주러 올 수 있다는 확신'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확신은 국가와 선주가 제공해야 한다. 

 

[관계 기관의 역할]

모든 배에는 최소한의 안전 장치와 구명 버튼이 있어야 한다. 배가 조난당했을 때 어느 정도 시간 안에 누군가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승객들에게 제공해야 한다. 이러한 정보가 제공될 때 승객들은 패닉에 빠지지 않고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관계 기관은 승객들이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주변에서 철저히 챙겨야 한다.